두껍게 입은 외투를 벗고 선글라스를 껴야 할 정도로 답사 이틀째의 가나자와는 따뜻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고 들었는데도 말이다.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던 날 가나자와의 시민을 도시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3곳을 방문했다. 바로 <시민예술촌>과 <장인대학>, <창작의 숲>이다.
가나자와 시는 20년 전 폐업한 방적공장을 하나 사들였다. 이 방적공장은 한동안 가나자와 젊은 여성들의 일자리를 책임졌던 중요한 산업이었지만 대부분의 방적공장이 그렇듯 점차 쇠퇴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10만 평방미터, 동경 돔 야구장의 2배 면적에 달하는 이 거대한 공간을 시에서 사들여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생시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민예술촌이다. 생각해보면 영국의 <테이트모던>이나 중국의 <다산쯔798>처럼 쇠퇴한 공장이나 버려진 창고공간을 상업적으로 이용해 성공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공간으로 사용한 사례는 가나자와가 처음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이다.
사실 가나자와 시가 이 공장 부지를 매입할 당시 처음부터 용도를 시민들을 위한 것으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상업시설로 리모델링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큰돈을 벌수도 있었다. 하지만 1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했고, 그 결과 이 공장 부지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참 대단한 결정이다.
그들은 문화라는 것이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1~2년의 흑자나 적자와 같은 경제적 개념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신념이 오늘 날의 시민예술촌을 만든 것이다. 사실 여전히 가나자와 시가 운영하는 각종 문화시설들은 외형상으로는 큰 적자를 내고 있다. 대부분의 시설이 영리의 목적이 아니라 자체 수입보다는 시의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민예술촌도 소액의 이용료수입을 제외하면 모든 운영비용이 시민들의 세금이다. 중요한 것은 가나자와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세금이 이런 용도로 쓰이는 것을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시민예술촌이라는 공간이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민예술촌은 멀티공방, 드라마공방, 오픈스페이스, 뮤직공방, 아트공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다양한 공방들에서 각종 문화예술활동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설은 가나자와 시민들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모든 시민이 이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들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설 이용료인 300엔만 내면 말이다. 고작 300엔인데 심지어 이 이용료는 오픈 이래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가격이라고 한다. 사실 좀 궁금했다. 왜일까? 시민예술촌이라고 하는 것은 가나자와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특권이 아닌가? 가나자와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인데 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요금으로 개방하는 것일까? 이래서야 가나자와 시민들을 부러워할 수 없잖아?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유학생이던 친구만 입장료 할인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공방들을 돌아보고 난 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은 문화라는 것을 이 공간에서 단순히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카리나를 연주하는 사람들, 그림을 그려서 전시하고 있는 사람들, 밴드공연 연습이 한창인 사람들... 가나자와 시민들은 시민예술촌이라는 공간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주인이 아니다. 그들은 이 공간을 무대로 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었다. 단순히 시민예술촌이라는 시설을 이용하는 것으로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마 이것이 그들의 자부심일 것이다. 넓은 잔디밭 위 햇살이 반사된 붉은 벽돌의 건물은 가나자와 시민들의 자부심을 대변하듯 참 단단해보였다.
가나자와는 시민의 3분의 1이 예술가라고 할 정도로 아마추어 문화 예술가가 많은 도시이지만 그와 동시에 전통예술의 원형을 보존하고 계승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나자와 역에 가면 이러한 시의 신념을 잘 살펴볼 수 있는데 유리를 이용한 현대적 돔 광장을 일본 전통 북을 본떠 만든 두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건물형식은 전통문화가 현재 가나자와의 뿌리를 지탱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시민예술촌이 가나자와 시민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한다면 가나자와 장인대학과 창작의숲은 가나자와의 공예부문을 좀 더 중점적으로 계승하고자 만들어진 시설이다. 그 중 장인대학은 시민예술촌의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예부문에서도 특히 전통목조건물의 계승을 위한 후계자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장인대학은 중견기술자가 고도의 과정을 배우는 과정으로 전통문화의 원형을 더욱 심도 있게 연구하고 계승하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가나자와 유와쿠 온천여관 거리에서 자동차로 5분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유와쿠 창작의 숲은 가나자와 장인대학과는 달리 아마추어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시설이다. 특히 창작의 숲은 공예부문에서도 상대적으로 쇠퇴한 염색, 직물, 판화 등의 위크포인트(weak point)를 보충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데다가 21세기미술관과도 개관이 겹치면서 초기에는 시민들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추어 문화 예술가들을 위한 공방과 다목적 레지던시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공간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이 다목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개관 당시 가나자와 시에서는 창작의 숲을 공방정도의 역할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용자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건물 안의 주방을 이용객에게 오픈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창작의 숲에서 야외파티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아이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이용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들였더니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을 만들어 보자는 사람들이 생기는 식이다. 이렇게 공간을 새롭게 이용하려는 사용자들의 다양한 기획을 관리자들이 열린 태도로 받아들이고 또 실현시켜보는 수많은 과정 속에 단순한 공방이었던 창작의 숲이 오늘날의 그야말로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창작소”가 된 것이다.
우리가 방문했던 이 날은 다목적 연수동에 음악회 연습을 하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대학시절 관현악반동아리를 하면서 연습공간을 대관하기 위해 매번 애를 먹었던 때가 생각났다.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지만 한 번도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해보지 못한 것 같다. 빌린 공간을 흠 없이 이용하고 돌려주느라고 급급했지 공간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었다. 과연 우리는 그 공간의 주인공이었을까?
도시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가나자와는 이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다. 가나자와는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스스로 문화를 만들고 그것을 즐기는 주인공이 되어야 진정으로 문화가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의 문화를 만드는 것은 거창하고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씬(scene)을 만들어가는 주인공, 바로 시민이다.
(이 글은 2014년 무등일보 아트플러스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뉴욕 인사이트 트립 - 911메모리얼뮤지엄 (0) | 2024.03.17 |
---|---|
뉴욕 인사이트트립 - 뉴욕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7가지 공연! (0) | 2024.03.03 |
일본 인사이트 트립 - 나고야 지브리파크 (9) | 2024.02.04 |
가나자와 21세기미술관 (0) | 2023.03.18 |
도시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0) | 2023.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