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특정형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은 배우와 관객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인 무대의 장소적 제약을 벗어나 고유의 이야기나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가진 장소에서 그 공간과 연결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형식의 공연이다. 때문에 공연(극)의 구성 요소로서 장소가 가지는 역할이 매우 크며, 관객의 경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장소가 본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간에 도착하는 혹은 진입하는 과정에서부터 퍼포먼스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으며, 그 경험이 이후 공연에 대한 관객의 몰입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현장성을 살리고 배우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하는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과도 비슷해보이지만 방점이 공간에 찍혀있느냐, 관객과의 상호작용에 찍혀있느냐에서 조금씩 차이점이 있을 것 같다.
<1930모단걸다이어리>는 광주광역시 양림동에서 2015년에 초연된 장소특정형 연극이다. 1930년대, 격동의 시대 광주에 살았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시대의 숙명을 짊어졌던 음악가 J, 시와 사랑을 노래하던 문제적 신세대 K, 그리고 그들이 동경했던 신비로운 여성 마담 L의 만남을 담은 이야기로 "다형다방", "윌슨선교사사택", "오웬기념각" 등 양림동의 주요 공간들을 극의 무대로 직접 사용하는 장소특정형 연극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극의 무대를 관객과 배우가 함께 걸어서 이동하는 투어형 공연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처음 이 연극을 기획할 때 기획팀에서 상상했던 것은 "양림동 전체가 무대가 되는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 "양림동이 하나의 테마파크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양림동에는 근대역사문화자원인 건축물들이 굉장히 잘 보존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공간들을 활용해 멋진 씬을 연출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2015년까지만 해도 장소특정형 공연에 대한 국내 참조사례가 많지 않았기때문에 그 개념이 생소하긴 했다. 연출님께서 몇몇 참조사례를 공유해주셨는데 그 중에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사례가 바로 뉴욕의 그 유명한 <Sleep no more(슬립 노 모어)> 였다. 뉴욕의 맥키트릭호텔에서(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씬들이 펼쳐지고 관객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그 무대들을 돌아다니며 자신만의 이야기(결말)를 만드는 놀라운 형식의 공연이었다. 지금은 뉴욕에 가면 반드시 봐야하는 필수코스가 된 공연이다.
또한 2013년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의 개관 사전제작 프로젝트로 진행된 <ONEDAY, MAYBE, 언젠가>의 공연도 참조사례로 공부했다. 지금은 철거된 옛 광주여고에서 진행된 공연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광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룬다. 실제로 나는 이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어서 양림동에서 이같은 장소특정형 공연을 만든다는 것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양림동은 광주의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근대 광주의 대중문화를 이끈 걸출한 인물들이 출생하고 자란 동네로 유명하다. 때문에 여전히 마을 곳곳에서 매력적인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다. 연극 <1930모단걸다이어리>는 1930년대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양림동의 다양한 공간들을 그 무대로 삼고 있다. 2015년 장소특정형 공연으로 진행된 초연에서는 총 4곳이 무대로 사용되었는데 그 중 2곳은 근대역사문화유산인 건축물이고, 나머지 2곳은 회사에서 직접 운영하던 문화공간을 활용했다.
첫번째는 주인공 마담L이 운영하는 다방에서 세남녀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펼쳐지는 씬으로 "모단걸테이블"에서 진행되었다. 모단걸테이블은 실제로 운영되는 다방은 아니지만 1930년대 살롱의 무드를 담아 컨셉추얼한 문화공간으로 회사에서 운영하던 공간이다. 이곳에서 관객은 매표를 하고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집사와 함께 다방 안으로 들어가게된다. 이곳에서 관객은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들으며 실제 다방에 온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오웬기념각"으로 선교사 오웬이 그의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성금 모아 건립한 건축물이다. 예배와 집회를 위해 설계된 공간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근대 광주의 문화전당(근대식 공연장)이라 할만큼 다양한 문화예술공연들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광주 최초의 피아노 독주회가 열렸다고도 한다. 이런 장소적 DNA를 반영해 오웬기념각에서는 연주회 씬이 진행된다. 세번째 씬은 시인으로 각성하는 K의 장면을 주요하게 담고 있다. "다형다방"은 K의 모티브가 된 인물, 김현승 시인을 기리는 무인갤러리카페로 "다형"이라는 이름은 커피를 좋아했던 시인 김현승의 호에서 따왔다. 마지막 장면이 진행되는 "윌슨선교사사택"은 광주 최초의 서양식주택으로 이곳에서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모이는 사교 파티씬이 펼쳐진다. 실제로 예전에는 선교사들이 전축으로 음악을 들려주거나 집에서 구운 파이를 나눠주는 등 크고 작은 파티(모임)들이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연극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실존인물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음악청년J는 천재음악가로 불렸던 "정율성"을, 시인K는 양림을 대표하는 시인 "김현승"에서 그 모티브를 가져왔다. 마담L의 경우 극 중 시간여행자라는 신비로운 컨셉을 가지고 있는 허구의 캐릭터이지만, 충장로에서 거상으로 유명했던 여성 "김세라"에서 그 이미지나 상상력을 빌려왔다.
2015년 초연 당시 총 여섯번의 공연을 했는데 (양림동을 투어하면서 관람하는 장소특정형 연극이라는 특수한 공연상황 상 관객의 정원이 회당 20명밖에 되진 않았지만) 모든 좌석이 조기매진되었고 주요 방송사, 언론사 등에 모두 보도가 되는 등 정말 큰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관심을 받은 만큼 정말 준비과정에서 쉬운 것이 단 하나도 없는 공연이었던 것 같다.
장소섭외 및 협력을 얻는 과정, 배우캐스팅과 연습과정, 무대연출과 의상 및 소품을 준비하는 과정, 이 특이한 공연을 홍보하는 과정, 현장운영스탭들을 교육하고 합을 맞추던 과정, 리허설과 대망의 당일 공연 현장운영...등등등등 지금 생각하면 정말 모든 것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3~4번째 공연이었던 듯 한데, 한 번은 윌슨선교사 사택에서 진행되는 마지막씬을 준비하고 있는데 야외 조명이 다 꺼져버린 적이 있었다. 주변이 모두 오래된 건물이라 두꺼비집이 내려가버린 것이었다. 관객들은 다형다방에서 마지막 무대로 이동하고 있는 참이었다. 어둠 속에서 스탭들과 무전을 하는데 정말 땀이 삐질삐질났다. (다행히 극적으로 해결이 되었지만!!!ㅠㅠ)
하지만 그만큼 새롭고 의미있는 도전이었기 때문에 제작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된 것 같다. 나 역시도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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