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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다정함으로

아티클

by kkot_b 2024. 1.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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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글 중 이런 게 있었다.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었던 한 청년이 자살을 결심했다. 좁은 방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았지만 시끌벅적한 방법은 싫었던 그는 깊은 산속에 가기로 한다. 깜깜한 새벽 산으로 출발한 그는 일단 오밤중에 산에 가는 사람(일출을 보기 위한 등산객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변변한 장비 없이 야간산행에 오른 자신이 걱정돼 이것저것 챙겨주는 낯선 사람들의 호의에 두 번 놀랐다. 처음에는 귀찮고 부담스럽던 산객들의 간섭 끝에 산을 오르다 보니 정상까지 왔고 배도 고프고 땀이 흘러 왠지 다시 한번 살아볼 용기가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떠도는 글이다 보니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사연을 읽으며 왈칵 눈물이 났다. 다시 한번 살아보겠다 용기를 낸 글쓴이가 멋졌고, 그에게 그런 용기를 준 이름 모를 사람들의 다정함이 너무 고마웠다. 이야기 말미에는 그 뒤로 자신이 어떻게 삶을 다시 살아나가고 있는지 간단한 근황 같은 것도 적혀 있었던 것 같다.

 

"Please, be kind"

다정함이 필요한 시대다. 어두운 산길 속 혼자 걷는 청년이 신경 쓰여 랜턴을 빌려준 중년부부는 알았을까? 간식을 쥐어 준 아주머니는 알았을까. 어쩌면 그날 자신들이 누군가의 목숨을 살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마 결코 모를 것이다. 그들은 순간의 다정함을 베푼 것이다. 그러나 순간의 다정함이 누군가에게는 영원의 기억이 되기도 한다.

 

대학시절 지금처럼 장마가 시작되는 초여름이었다. 버스를 탈 때는 하늘이 꽤 맑았는데 내릴 때가 되니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환승할 지하철역까지 200m 정도 짧은 거리였지만 준비성 없는 무(無) 우산인은 홀딱 젖을 각오를 해야 했다. ‘오늘은 망했구나’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리는데 같이 내리신 40대 중반 정도 남성분이 “괜찮으시면 지하철역까지 같이 써요.”라며 우산을 씌워주셨다. 경황이 없어 역에 도착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는데 간단한 목례 후 쿨하게 총총 사라지신 그분의 뒷모습을 보니 내 안에 뭔가 몽글몽글한 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도 언젠가 우산 없이 뛰어가는 사람을 본다면 꼭 친절을 베풀어야지!!!’ 나는 그 뒤로 이 다짐을 여러 번 실천했다.

 

다정함은 조용하지만 강력하게 퍼져나간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격려와 응원의 말 한마디, 따뜻한 포옹, 공감을 담은 눈 맞춤, 작은 친절과 배려. 베풀 때는 큰 품이 들지 않지만 받는 사람은 천군만마와 같은 힘을 얻는다. 길었던 팬데믹 후 불안과 우울이 우리를 덮치는 바로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다정함”이 아닐까. 예산을 투입하고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하는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방법도 있지만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말이다. 타인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 그 어떤 해결책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이 세상을 바꿀지 모른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 스틸컷

 

올해 초 아카데미시상식에서 7관왕에 오르며 전 세계인의 관심을 독차지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주인공 에블린만큼 매력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에블린의 남편인 웨이먼드다. 그는 영화의 혼란 가득한 세상 속 먹이사슬 가장 아래 위치할 것 같은 캐릭터다. 실없는 농담과 엉뚱한 행동으로 남을 웃기고 실수투성이에 나서기보단 양보를 한다. 가공할만한 전투력과 필살기를 지닌 수많은 인물들의 싸움 속에서 나비의 날갯짓처럼 유약해 보이는 웨이먼드의 작은 결투들은 그러나 돌고 돌아 또 다른 친절을 만들고 사랑을 연결하며 세상을 구한다. 그는 혼돈에 빠져버린 세상에서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땐 다정함을 보여달라(Please, be kind)고 외친다. 그는 약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강할, 주먹질을 따듯한 포옹으로 바꿀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이다. 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오늘도 다정함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는 당신들에게 고맙다. 당신의 다정함으로 세상을 구원하리.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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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23년 무등일보 청년칼럼에 기고한 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http://www.mdilbo.com/detail/AVkixT/69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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