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위에서 몇 번의 클릭으로 지구 너머의 소식도 알 수 있는 요즘이다. 지역(Local)에서 세계를 만나고(Glocal), 지역에서 지역으로(Interlocal) 언제든지 접속하고 소통한다. 새로운 시대에 도시는 어떻게 확장되며,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혹은 우리는 ‘어떤’ 마을에서 ‘어떻게’ 살고 싶을까.
“지역에서 기획자의 삶은 어때? 좀 낫니?”
중앙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 친구들은 지역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주 묻는다. 좀 나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지역이라고 팍팍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기획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광주광역시 양림동의 쥬스컴퍼니라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벌써 5년 차다.(연차를 세어보고 나도 놀랬다.) 양림동이 좋아서,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문화기획자로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망설이는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자신 있게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그랬으니까 말이다. 청년들을 위한 전폭적인 지원과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지역에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 아니다. (중앙과 지방은 파이의 크기와 나누는 사람의 수가 다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그래서 우리가 도전할 수 있는 수많은 자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캐낼 것이 많은 광산처럼 말이다. 청년들에게 도전의 무대가 되기에 충분하다.
양림동은 일찍이 서양 선교사들이 정착을 시작하면서 근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이 빠르게 시작된 곳이다. 행정구역 상 면적은 크지 않지만, 작은 동네에 수많은 학교, 병원, 교회가 위치해 있다. 건축물을 포함한 다양한 근대문화자원들이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커피를 좋아했던 시인 김현승, 천재 음악가 정율성, 광주의 어머니라 불리는 YWCA의 조아라 등 근대 광주 대중문화를 이끈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이 출생하고 활동했다. 필자가 느낀 양림동의 가장 큰 매력도 이런 인물들의 스토리였다. 동네 골목 곳곳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양림동의 다양한 씬(Scene)을 끊임없이 만들어준다.
지난 몇 년간 양림동을 배경으로 축제, 공연, 전시, 아카데미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수많은 도시들과 교류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양림에서 북성로를 만나고, 광주에서 호이안을 만난다. 우리는 이미 지역에서 지역으로 바로 접속하고, 세계를 향해 소통한다. 예로부터 조상님들은 “사람은 자고로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지만 문화기획자들이 성장하기에 지역은 더 이상 작은 판이 아니며, 마을은 가장 큰 배움의 터가 된다. 지역에는 발굴되지 않은(혹은 못한) 무궁무진한 역사적, 문화적 자원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어느 유명 대학의 교수님 못지않은 향토자료연구가(aka. 숨은 고수) 분들이 있다. 지역은 스스로 탐구하고 도전할 수 있는 젊은 기획자를 기다리고 있다. 마을 안에서 문화기획자로서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것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에서 배운 유의미한 정보의 축적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획자가 마을을 변화시켜 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마을을 통해 기획자가 학습하고 성장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며 관계 맺기를 경험하고, 공동체의 긍정적인 선순환 시스템에서 착안한 새로운 문제해결방식을 배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관찰되는 사람들의 습관을 통해 미래 라이프스타일의 영감을 얻는다. 청년들이 충분한 시간과 인내심을 가지고 이와 같은 배움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중앙보다 지역이 훨씬 적합하다고 본다.
물론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모든 청년들에게 무작정 지역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중앙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좀 더 취약한 기획자들의 안정적인 인건비 책정과 경력 인정 시스템 등 기반을 다져나가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점은 지역에서는 유능하고 진정성 있는 기획자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역에서의 삶이, 마을에서의 삶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필자는 기획자로서 첫 도전을 양림동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또한 계림동, 학동, 사동 등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네가 광주에는 아직도 무궁무진하게 많다. 그러니 문화기획자를 꿈꾸는 청년들이여! 지역으로, 또 마을로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지 이곳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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